회춘 주사부터 화학적 거세까지 — 스테로이드가 쓴 기괴한 120년

이 글은 스테로이드의 역사와 과학을 정리한 정보성 콘텐츠이며, 특정 약물의 사용·중단을 권하는 의학적
조언이 아닙니다. 스테로이드 계열 약물은 반드시 의사·약사의 처방과 상담에 따라 사용해야 하며, 임의
복용은 심각한 부작용을 부를 수 있습니다.

1889년, 프랑스의 저명한 생리학자 샤를 브라운-세카르는 72세의 나이에 파리 학회에서
기묘한 발표를 한다. 개와 기니피그의 고환에서 뽑은 추출액을 자기 몸에 주사했더니 젊어졌다
것이다.1 오늘날 ‘스테로이드’라 뭉뚱그려 부르는 물질들의 역사는 바로
이 황당한 자가실험에서 출발한다. 이 글은 경상국립대 약학과 백승만 교수가 유튜브 채널 ‘이강민의 잡지사’에서
풀어낸 이야기를8 바탕으로, (1) 스테로이드가 왜 한 가지 물질이 아닌지,
(2) 회춘의 꿈이 어떻게 위약으로 판명됐는지, (3) 냉전이 만든 도핑, (4) 같은 분자가 암 치료제이자
화학적 거세제가 된 과정
을 검증된 출처와 함께 따라간다.

‘스테로이드’는 한 가지 물질이 아니다

사각·육각 고리가 이어진 스테로이드 분자 구조 개념 이미지 — 콜레스테롤에서 갈라져 나온 수많은 스테로이드
스테로이드는 ‘스테롤(콜레스테롤)을 닮은’ 고리 구조를 공유하는 수천 종의 물질을 통칭한다.

스테로이드(steroid)라는 말 자체가 ‘스테롤(sterol)을 닮은 물질’이라는 뜻이다. 가장
대표적인 스테롤이 콜레스테롤인데, 우리 몸은 하루 약 1g씩 콜레스테롤을 스스로 만들어
세포막·신호전달·호르몬 합성에 쓴다. 1930년대에 성호르몬의 구조가 밝혀지자, 테스토스테론이나 에스트로겐이
모두 콜레스테롤에서 몇 단계를 거쳐 만들어지는 ‘콜레스테롤을 닮은’ 구조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래서 이들을
묶어 스테로이드라 부르게 됐다.

문제는 이름이 하나라서 물질도 하나라고 오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스테로이드는 수천 종에 이르고 작용은
정반대이기도 하다. 근육을 키우는 단백동화(아나볼릭) 스테로이드가 있는가
하면, 병원에서 처방하는 염증 치료용 스테로이드는 오히려 근육을 분해하는 쪽에 가깝다. 원
영상에서 백 교수마저 박사과정 시절 염증약으로 스테로이드를 먹으며 “근육이 늘겠지”라고 착각했다고 고백할
만큼,8 한 단어가 품은 세계는 넓다.

72세 생리학자의 ‘회춘 주사’

브라운-세카르는 파스퇴르와 교류하던 당대 최고의 생리학자였다. 그가 “두 시간도 일하기 힘들던 내가
주사 뒤 활력을 되찾았다”고 발표하자 학계는 냉소했지만 대중은 열광했다. 실험 대상이 자기 자신
한 명
뿐이고 대조군도 없었지만, ‘회춘’이라는 단어의 매력이 그 결함을 덮었다.1

추출액의 정체는 개·기니피그의 혈액·정액·고환 추출액을 섞은 것이었다. 그는 한 달간
아홉 차례를 맞고 회춘을 선언했고, 곧 ‘세카르 주사(Séquardine)’로 팔려나갔다. 1889년
말에는 1만 2,000명 이상의 의사가 이를 시술했고 제조업자들은 ‘생명의 묘약’으로 큰돈을
벌었다.1 정작 그 자신은 5년 뒤인 1894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주사에는 정말 회춘 성분이 들어 있었을까? 2002년, 호주 연구진이 브라운-세카르의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해 Medical Journal of Australia에 결과를 실었다.2
추출액 속 테스토스테론의 양을 측정했더니, 생물학적 효과를 내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수준이었다.
성인 남성이 하루에 만들어내는 테스토스테론에 견주면 수만 분의 1에 불과했다.

결론은 명확했다. 브라운-세카르가 느낀 활력은 물질의 약효가 아니라 ‘젊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만든
위약효과
였다. 근대 남성의학(안드롤로지)이 위약 한 방으로 문을 연 셈이다. 몸을 되돌리고 싶다는
욕망은 시대를 가리지 않지만, 그 지름길이 대개 착시라는 점도 그대로다 —
진짜 나이보다 젊어지는 건강법이 결국 특효약이 아니라 생활습관으로 귀결되는 것과 같다.

동물 고환을 사람에게 — 회춘 이식의 시대

어두운 표면에 떨어지는 황금빛 액체 방울 — 생명의 '정수'를 찾아 헤맨 회춘 실험
고환에서 ‘젊음의 정수’를 뽑아낼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정작 그 안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추출액이 시들해지자 다음 발상은 더 과감해졌다. 아예 고환을 통째로 이식하자는 것이다.
프랑스 외과의 세르주 보로노프는 원숭이의 고환 조직을 사람에게 이식하는 ‘원숭이 샘’ 시술로
192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미국에서는 교도소 의사 레오 스탠리가 사형수와 동물의 고환을
재소자에게 이식하며 1,000건 가까운 시술을 남겼는데, 당시엔 이를 ‘내분비 범죄학’이라 부르기도 했다.

결과는 전부 실패였다. 고환은 남성호르몬을 만들자마자 곧바로 혈류로 내보내고 저장하지 않기
때문
이다. 백 교수의 표현대로 ‘텅 빈 공장’이라 잘라 옮겨봤자 뽑아낼 것이
없었다.8 1930년대에 학계는 “고환 이식은 답이 아니다”라고 결론짓는다.

소 고환 100kg과 소변 15톤 — 테스토스테론의 발견

이식이 막히자 과학자들은 방향을 틀었다. 고환에 들어 있을 주성분만 분리하자는 것이다.
1935년, 세 갈래의 연구가 거의 동시에 결실을 맺는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연구진(에른스트 라쿠어)은
소 고환 100kg에서 약 10mg을 뽑아내 이 물질에 ‘테스토스테론(testis+sterol)’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독일의 아돌프 부테난트는 남성 호르몬이 소변으로 배설된다는 점에
착안해 경찰관들에게서 모은 수천 리터의 소변에서 이를 분리했고, 스위스의
레오폴트 루지치카는 콜레스테롤로부터 합성하는 길을 열었다.3

흥미롭게도 정작 이름을 붙인 라쿠어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고, 소변과 합성으로 길을 연 부테난트와 루지치카가
1939년 노벨 화학상을 함께 받았다.3 그러나 이 호르몬도 곧바로
‘약’이 되진 못했다. 먹으면 흡수가 안 됐고, 억지로 삼키면 간이 분해하려다
간독성을 냈다. 이 문제를 넘으려 구조를 변형한 것이 훗날 단백동화 스테로이드
출발점이 된다.

불에 기름을 붓다 — 전립선암과 호르몬

1941년, 시카고의 비뇨기과 의사 찰스 허긴스가 충격적인 결과를 내놓는다. 전립선암이 있는
대상에게 테스토스테론을 주자 암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커졌고, 반대로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을 주자 전립선암이 줄어들었다. 남성호르몬이 전립선암을 키운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이다.4

이 발견은 실망이 아니라 치료법으로 이어졌다. 암이 특정 호르몬에 의존해 자란다면, 그
호르몬을 차단하는 것이 곧 치료가 된다. 암이 감염병이라고 여기던 시절, 허긴스는 ‘호르몬 의존성 암’
이라는 개념을 세웠고 그 공로로 196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4
전립선암·유방암의 호르몬 치료가 여기서 출발했다 —
전립선암과 식습관을 함께 보면 예방과 치료의 그림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냉전이 만든 도핑 — 벤 존슨에서 배리 본즈까지

해질녘 텅 빈 육상 경기장 트랙과 긴 그림자 — 도핑으로 얼룩진 스포츠의 그늘
2차 대전 뒤 스포츠는 체제 경쟁의 대리전이 됐고, 그 틈에 약물이 파고들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자, 스포츠는 총성 없는 체제 경쟁의 대리전이 됐다.
근육을 키운다고 알려진 테스토스테론이 주목받았고, 동독·소련이 먼저 쓰자 미국도 뒤따랐다. 참전용사이자
보디빌더였던 미국의 한 의사(존 지글러)는 제약사와 손잡고 테스토스테론을 변형한 단백동화
스테로이드
를 역도 선수들에게 보급했다.8

대가는 컸다. 스테로이드를 과하게 쓰면 뇌가 “호르몬이 넘친다”고 판단해 자체 생산 회로를 꺼버려,
고환이 위축되고 정자가 만들어지지 않으며 전립선이 붓고 탈모가 온다. ‘무기’로 쓰려던 약이
몸을 망가뜨린 것이다. 부작용이 심각해지며 1970년대에 스테로이드·각성제가 줄줄이 금지됐고
도핑 검사가 보편화됐다.

그러나 검사가 정교해질수록 안 걸리는 약물도 진화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100m 결승에서
캐나다의 벤 존슨이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다가 사흘 만에 금지약물(스타노졸롤)로 실격된 사건이 상징적이다.
2000년대엔 미국의 발코(BALCO)가 검사에 안 잡히는 ‘디자이너 스테로이드’ THG(‘더
클리어’)
를 공급하다 적발됐고, UCLA의 돈 캐틀린이 이 미지의 물질을 역으로 합성해
정체를 밝혀냈다. 이 사건으로 시드니 올림픽 스타 메리언 존스와 메이저리그 최다 홈런의
배리 본즈가 줄줄이 얽혔다.7 약물 없이 그 시대를 버틴 선수가
오히려 대단해 보이는 이유다 —
근육 성장과 영양 섭취는 지름길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다.

같은 분자가 ‘거세’가 되고, ‘신의 물질’이 되다

남성호르몬을 차단하는 방향은 또 다른 역사를 낳았다. 전립선암을 줄이려 여성호르몬을 쓰던
원리가 성충동을 억제하는 화학적 거세로 이어진 것이다. 1940~50년대엔 동성애를 질병·범죄로
보던 시각 속에서 남성 동성애자에게 이 약물이 ‘치료’ 명목으로 쓰였는데, 앨런 튜링이 1952년 에스트로겐
계열로 화학적 거세를 강요당한 사건이 대표적이다.6 오늘날엔 전립선암
치료
성범죄자 약물치료 두 갈래로 쓰이며, 한국도 2011년부터 정신과 감정을 거쳐
시행한다.6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흔히 맞는 스테로이드는 이 모든 것과 계열이 다르다. 신장 위 부신에서
약 95%가 만들어지는 코르티솔은 ‘스트레스 호르몬’이자 염증을 잡는 최고의 물질
이다. 일반 소염제와 비교가 안 될 만큼 강력해 ‘신의 물질’로 불렸고, 그 효과를 입증한 연구는
1950년 노벨 생리의학상으로 이어졌다.5 다만 오래 쓰면 뼈에서
칼슘이 빠져 골다공증 위험이 커지고 정신적 부작용도 온다. 효과가 강할수록
종류·용량·기간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
염증과 면역의 관점에서 보면 왜 이 물질이 양날의 칼인지 이해가 쉽다.

결론 — ‘스테로이드’라는 한 단어를 의심하라

스테로이드는 하나의 물질도, 하나의 도덕적 꼬리표도 아니다. 같은 뿌리(콜레스테롤)에서 갈라진 분자들이
회춘의 환상·근육·암 치료·화학적 거세·염증 억제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스테로이드’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다음을 스스로 물어보자.

  1. 지금 말하는 스테로이드가 근육용(아나볼릭)인가, 염증 치료용(코르티코)인가,
    성호르몬인가? 셋은 작용이 전혀 다르다.
  2. ‘젊어진다·강해진다’는 약속에 대조군 있는 근거가 붙어 있는가, 아니면 기대가 만든 위약인가?
  3. 병원에서 처방받은 스테로이드라면, 용량과 사용 기간·중단 계획을 의사와 확인했는가?
  4. 효과가 빠르고 강할수록, 그만큼 대가(부작용)도 크지 않은지 함께 따졌는가?
참고 자료

  1. 브라운-세카르의 회춘 주사(1889, 72세, 개·기니피그 고환 추출액, 1889년 말 1만 2,000명 이상 의사 시술) —
    테스토스테론의 역사 리뷰.
    PMC — The rejuvenation of testosterone: philosopher’s stone or Brown-Séquard Elixir?
  2. 2002년 재현 실험 — 추출액의 테스토스테론이 효과를 내기엔 극미량, 위약효과로 결론.
    Medical Journal of Australia 2002;177(11) — Brown-Séquard revisited
  3. 1935년 테스토스테론 분리·명명(라쿠어)과 1939년 노벨 화학상(부테난트·루지치카, 콜레스테롤로부터의 합성).
    NobelPrize.org — Chemistry 1939 ·
    Britannica — Adolf Butenandt
  4. 찰스 허긴스 — 호르몬 의존성 전립선암(테스토스테론은 촉진, 에스트로겐은 억제), 1966년 노벨 생리의학상.
    NobelPrize.org — Medicine 1966, Charles B. Huggins
  5. 코르티솔·코르티손(부신피질 호르몬)의 항염 효과 — 1950년 노벨 생리의학상(켄들·라이히슈타인·헨치).
    NobelPrize.org — Medicine 1950
  6. 화학적 거세(에스트로겐·항안드로겐) — 앨런 튜링(1952)과 한국의 2011년 성충동 약물치료 시행.
    위키백과 — 화학적 거세
  7. 발코(BALCO) 사건 — 디자이너 스테로이드 THG(‘더 클리어’), 돈 캐틀린의 규명, 메리언 존스·배리 본즈 연루.
    Wikipedia — BALCO scandal
  8. 원 영상 — 유튜브 ‘이강민의 잡지사’, 「젊고 강해지기 위해 인류가 벌인 기괴한 실험들 — 스테로이드 오디세이」(백승만 교수).
    youtu.be/ZfDmHxpyASA

※ 개별 수치·일화는 원 영상과 위 출처를 기준으로 하며, 세부 수치는 자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스테로이드 약물의 사용은 반드시 전문가와 상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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